2009년 03월 22일
유럽의 3大國 '불황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양대 소비 엔진인 유럽 경제가 최근 급격한 침체 양상을 보이며 세계 경제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작년 3분기 글로벌 금융위기 초반만 해도 미국의 불행을 '남의 집 불구경'처럼 여겼던 유럽 경제는 금융위기 불길이 실물경제로 번지면서 미국과 똑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금융업 비중이 큰 영국이 먼저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더니, 세계 최대 수출국인 독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황에 내성(耐性)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프랑스 모델(국가 관리 자본주의)'도 불황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 경제권인 유럽연합(EU) 경제의 절반 이상(GDP 기준)을 책임지고 있는 영국·프랑스·독일 경제의 회복 여부는 세계 경제의 향방에 중대 변수이다. 유럽 3대 경제 대국의 현황과 각국 정부의 고민을 짚어본다.
- ▲ 지난 3일 영국 런던의 한 금융회사 직원이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자 괴로워하는 모습 / 블룸버그
- ▲ 최근 영국은 경제위기로 소비도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런던의 한 상점에 내걸린 '반값 세일' 문구가 경기침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블룸버그
골프용품 매장에서는 던롭 브랜드의 우드(wood)를 15파운드(약 3만원), 퍼터는 단돈 10파운드(2만원)에 팔고 있었다. 우드의 원래 가격표를 보니 79파운드(16만원). 가격 할인율이 무려 80%다. 골프채 외에도 원래 가격과 비교하면 '거저다' 싶은 물건이 많았는데, 매장엔 손님도 없고 활기가 없어 보였다.
퍼터(putter)를 하나 집어 들고 계산대 점원에게 말을 거니 "작년 겨울부터 1년 내내 세일 체제로 돌입했는데도 손님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화를 살펴보던 이안(20)이란 청년은 "부가세 할인 혜택을 피부로 느끼느냐"는 물음에 "30% 이상 할인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세금 좀 깎아준다고 필요 없는 물건을 사겠느냐"고 되물었다.
■ 영국… '우등생'에서 '문제아'로 전락
금융업 집중하다 역풍 맞아…골프숍 80% 할인해도 썰렁…
성장률 60년만에 최저 예상
영국 정부는 추락하는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작년 말 막대한 세수(稅收) 감소를 감수하고 소비재 부가세율을 17.5%에서 15%로 내리는 '도박'을 감행했지만, 실제 소비 현장에선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업자 200만명 돌파, 최근 1년간 주택 가격 평균 20% 하락, 지난해 2만8000개 기업 도산(전년 대비 10.3% 증가)…. 최근 나오는 경제지표를 봐도 영국 경제는 '백약이 무효'라고 진단할 수 있을 만큼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 영국의 기업단체인 영국산업연맹(CBI)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60년래 최저치인 -3.3%를 기록하고, 집값은 15% 이상 추가 하락하며, 실업자는 3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Rogers)는 "북해산 원유는 빠르게 고갈되고 있고, 상태가 괜찮은 은행이 단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영국의 금융섹터는 무너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은 더 이상 팔 것이 없다"며 영국 경제에 대한 '사망 선고'를 내렸다.
10년 이상 잘 나갔던 영국 경제가 '국가 부도'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급격히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은 1980년 말 시장 개방과 규제 철폐를 기치로 내세운 대처주의(Thatcherism)에 입각해 금융업을 집중 육성했다. 런던이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전체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9.4%(2006년 기준)까지 올랐고, 런던 거주 근로자의 10명 중 3명 이상이 금융업에 종사할 정도가 됐다. 금융업과 연계된 각종 컨설팅, 법률·회계 서비스 산업도 급속히 성장해, 영국은 '금융국가'로 거듭났다.
영국 정부는 금융산업을 육성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금리, 고(高)파운드화(貨) 정책을 장기간 유지했다. 그 결과 외국 자본이 대거 유입돼 금융업 성장 기반이 탄탄해졌다.
그러나 후유증도 컸다. 제조기업들은 생산 비용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대거 해외로 공장을 이전해야 했다. 또한 금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과잉 유동성 문제를 낳아 영국 전역의 주택 가격 급등을 촉발했다. 영국의 주택 가격은 2007년까지 10년 동안 3배로 뛰었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대형 은행들이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쓰러지자, 금융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성장 동력을 상실했다. 금융 불안이 실물 경기로 전이되고, 실물 경기 추락은 다시 금융 불안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졌다.
영국으로선 소비 진작과 주택 가격 추가 하락을 막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를 위해 정책금리를 연 0.5%까지 내리고,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시장에서 채권을 직접 사들이는 '양적 완화' 정책까지 예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약효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영국의 고민은 금융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는 데 있다. 영국 입장에선 금융시스템이 다시 선순환 구조로 돌아서도록 만드는 게 최선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세계를 대상으로 '국제 공조 메신저' 역할을 자임하며 발품을 팔고 다니는 것도 자국 경제구조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독일… 수출 의존도 높아 경제 치명타
수출 격감으로 1차 충격… 동유럽에 빌려 준 자금 많아…
제2의 충격 올까 안절부절
작년 9월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만 해도 독일은 느긋했다. 영국이 범(汎) 유럽 은행 구제금융 펀드를 만들자고 제안하자, 독일은 "빚으로 흥청망청 소비했던 국가들을 구하는 데 왜 독일 납세자들이 돈을 내야 하느냐"면서 이 같은 요구를 일축했다. 독일은 또 영국, 프랑스 등이 범유럽 공동 경기부양책을 만들자고 하자, "각자 알아서 대응하자"고 꽁무니를 뺐다. 은행 부실도 상대적으로 적고, 재정도 튼튼한 편인데 왜 '병자(病者)'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느냐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하지만, 작년 4분기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 경제 침체로 옮겨 붙으면서 세계 무역이 급격히 위축되자, 사정이 180도 돌변했다. 유럽 주요 국가 중 수출 의존도가 가장 큰 독일 경제가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수출은 독일 경제의 성장 엔진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0% 이상을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올 1월 한달간 수출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20%(2009년 1월 기준) 격감했다. 독일의 대표적 수출업종인 기계류 수출 주문은 2월 중 전년 대비 40%나 감소했다.
독일 자동차(벤츠, BMW, 아우디, 포르쉐, 오펠)도 세계적 수요 감소로 경영난에 빠져 있다. 독일 자동차업계는 아직까지는 조업 단축과 생산 감축으로 버티고 있지만, 판매 부진이 장기화될 경우 공장 폐쇄와 대량 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독일 자동차산업은 고용 근로자가 500만명(하청업체 포함)에 달해, 독일 근로자 7명 중 1명은 자동차 관련 일자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최근엔 미국 자동차회사 GM의 자회사인 오펠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2만9000개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독일은 유럽 국가 중 최대 규모인 800억 유로(160조원)가 투입되는 경기 부양 안을 마련해 대응에 나섰지만, 세계 수요 회복으로 수출에 청신호가 켜지지 않는 한 반전(反轉)의 기회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Merkel) 독일 총리는 최근 의회 연설에서 "독일 경제가 통일 이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문제가 너무 심각해 경제 교과서로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게다가, 새해 들어 동유럽발 경제위기가 불거지면서 독일 금융산업에 또 다른 적신호가 켜졌다. 독일 은행들이 동유럽에 빌려준 자금은 2199억달러(작년 말 기준, 국제결제은행 자료)에 달해 경쟁국인 프랑스(1551억달러), 영국(244억달러)보다 월등히 많다. 독일 경제는 1989년 동독을 흡수 통일한 뒤 막대한 통일 비용 탓에 장기 침체 국면에 빠졌었다. 그러나 동유럽과 러시아 경제의 부활 덕에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동유럽 경기가 활황세를 타면서 독일 자본재 수요가 크게 늘어나 독일 경제가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
특히, 독일 기업들은 생산 비용 절감을 위해 임금이 저렴한 동유럽에 생산기지를 대거 이전해 독일과 동유럽은 '윈-윈(win-win) 구도'를 형성, 번영의 과실을 나눴다. 독일계 은행의 동유럽 대출이 유난히 많은 것도 독일기업의 동유럽 직접투자(FDI) 확대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로 동유럽 경제가 무너지면서, '윈-윈 구도'는 '수렁'으로 돌변, 독일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 프랑스… 불황 내성 강하다고 자랑하다 휘청
자동차 산업 경영난 심각… 청년 실업률 25% 육박…
'수퍼마켓 털이' 활개쳐
요즘 프랑스에선 현대판 '로빈후드'가 활개를 쳐 수퍼마켓 등 유통업체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자신을 실업자 단체 소속 '운동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느닷없이 수퍼마켓에 들이닥쳐 쇼핑카트에 물건을 잔뜩 싣고는 돈을 내지 않고 나오는 것이다.
또 프랑스 서민들 사이에선 수퍼마켓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쓰레기통에 버린 식료품을 뒤지는 행위가 확산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이들을 '이삭 줍는 사람들(les glaneuses)'이란 예술적 표현으로 점잖게 부르지만,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영국, 독일 등 경쟁국에 비해 내수 비중이 높고(작년 GDP 대비 내수 비중이 103%였다),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불황에 내성이 강하다고 자부해왔다. 올 초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 몽드 지(紙)는 "위기 국면에서 프랑스 모델(국가 관리형 자본주의 체제)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불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1월 산업생산 전년대비 11% 감소, 1월 무역적자 45억 유로 등 최근 나오는 경제 지표는 이런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급격한 소비 침체로 인한 생산 위축 탓에 매달 신규 실업자가 9만명 이상 발생하고 있고, 청년 실업률은 25%에 이른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프랑스의 주요 산업인 자동차, 화장품, 항공기 수출이 급감, 최근 1년간 무역수지 적자가 800억유로(160조원)에 이른다.
특히 푸조와 르노자동차 등 자동차 산업의 경영난은 프랑스 경제 전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직접 고용 70만명, 하청업체 등 간접고용까지 합하면 250만명의 일자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작년 4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1.2%를 기록했다. 독일(-2.1%)이나 영국(-1.8%)보다는 낫지만, 마이너스 성장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을 -1.5%로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는 위기 대응책으로 노골적인 '보호주의(protectionism)' 정책을 들고 나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대통령이 자국 자동차 산업에 대해 60억 유로의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해외로의 공장 이전 금지, 자국 내 자동차 공장 집단 해고 금지 등의 단서 조항을 붙인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위기 대응 과정에서 프랑스 특유의 '국가 개입주의(dirigisme)' 철학을 적용한 것이지만, 이미 단일 시장으로 통합된 유럽연합(EU)의 이념과 배치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비해 독자적인 정책 선택의 폭이 좁아진 점이 위기 극복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한편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인 카를로스 캐서레스(Caceres)는 "프랑스는 노동 유연성과 소비 탄력성이 떨어져 불황의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경기 회복 시점에 들어가면 이런 장점이 고스란히 약점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경제 성장세가 회복되면 독일 등 수출 중심 국가들은 빠르게 경제가 회복되겠지만, 프랑스는 회복 속도가 훨씬 더뎌 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할 것이란 얘기다.
# by | 2009/03/22 01:01 | 세계 정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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